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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x독서]/독서리뷰

[도서리뷰:한국사] 1950 미중전쟁(KBS 다큐 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 제작팀)

by 토요히스토리 202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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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역사일반] 역사의 쓸모 (최태성)

 

안녕하세요:)
역사 블로그 '토요히스토리' 입니다.
4번째로 인사드리는 역사 도서 리뷰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6·25 전쟁

'미국과 중국의 갈등' 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본 책이 있습니다.

 

KBS 명품 다큐멘터리

'다큐 인사이트'에서 제작한 것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인데요!

바로 리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서평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상흔. 6.25 전쟁을 다룬 책이다. 기존의 남한과 북한의 관점이 아닌 국제적인 관점, 특히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6.25전쟁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오산과 오판으로 비롯된 이 비극을 살펴보며,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북한, 소련, 중국, 미국의 시각은 모두 달랐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된 무고한 시민들과 장병들을 생각하니 전쟁의 원인과 과정이 매우 안타깝고 슬펐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6.25전쟁을 설명하는 부분은 4페이지에 불과한데, 이 책을 통해 더 넓은 시각과 관점에서 6.25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국제적 관점으로 각국의 이해관계와 속셈, 판단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하다 보면, 지금의 미중갈등과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현명하게 미래를 대처하기 위해서는 70여년 전의 경험에서 얻은 값진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오판
2. 충돌

3. 대치

 

역사 이야기

1. 오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 초기. 북한은 어떻게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남한을 침공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신생국 중화인민공화국이 내상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까닭은? 거기에는 여러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점철되어 있었다.

 1) 미국의 오산과 오판
  - 미국은 1949년까지 원자 폭탄을 독점하였고, 강력한 경제를 갖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오프태클(운동 경기에서 상대방의 허점을 뚫어 공격하는 플레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련이 유럽을 손에 넣기 전에 소련의 주요 전략 시설을 핵무기를 통해 선제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게 되면서 이 전략은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 미국의 오프태클의 초점은 유럽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전략적으로 유럽, 중동, 동아시아의 순서로 생각했다. 처음부터 전쟁에 개입하여 한국을 방어한다는 것은 미국의 계획에 없었고, 오히려 일본을 방어해 소련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한 미군은 1949년 6월 철수한다. 그 이유는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주둔의 명분이 사라졌고, 무엇보다도 한반도는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상 중요성이 떨어지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발표했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었다. 이는 공산권 국가들에게 큰 오판을 불러일으킨다.

 2) 북한, 소련, 중국의 오산과 오판
  - 38선 이남에서의 주한미군 철수,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라는 세 가지 변화는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오류를 범하게 만들었다. 
  · 김일성(북한):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참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일본이 참전하더라도 북한군이 재빨리 남한을 점령해버리면 힘을 못 쓸 것으로 전망했다. 더구나 북한 지도부는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 전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북한군 편에서 싸워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렇게 된다면 전쟁은 3일만에 끝날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마오쩌둥(중국): 마오쩌둥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고 타이완을 해방시키려는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개입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 스탈린(소련): 소련에서도 원자탄을 개발했기 때문에 미국의 쉽게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스탈린은 미국이 방해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때문에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은 오판을 실행으로 옮겼다. 1950년 6월 25일, 북하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강행했다. 공산 측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의 예상,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산 측의 판단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2장. 충돌
 세계 3대 동계전투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를 비롯, 처절했던 1950년 겨울 한반도 북부 전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미군의 최강 화력이 산악지형에 무용지물이었던 반면, 중국군은 이미 국공내전으로 다져진 게릴라전의 베테랑이었다. 한편 진영을 막론하고 무서운 적이 있었다. 바로 혹한이었다.
  - 군우리 전투: 1950년 11월 27~29일까지 오늘날 와원 인근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하여 2주간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 흥남 철수 작전: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흥남항구를 통해 철수한 작전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많은 피해를 입고 퇴로가 차단된 국군과 미군은 흥남에서 대규모 철수 작전을 개시하였다. 병력과 무기, 장비를 차례로 수송하였으나 흥남에 모인 피난민 30만 명은 승선하지 못했다. 김백일과 현봉학이 미군을 설득하여 폭약과 장비를 버리고 남은 공간에 피난민을 승선시켰고 총 9만 명이 탈출하였다. LST 한 척에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하였다. 이 작전으로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철수시켰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3장. 대치
 1·4 후퇴 이후 38선 부근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공방전. 전쟁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고 한반도의 군인과 민간인은 지쳐갔다. 그렇게 시작된 정전협상. 그런데 중국과 소련은 전쟁이 지속되길 바랐고, 그 결과 협상은 2년 넘게 이어졌다. 그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은 이후 미국과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오늘날 신냉전이라고도 불리는 두 국가의 대치 구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서 나가야 할까?

 1) 트루먼의 유럽 중시 정책과 정전협상 결렬

  - 트루먼은 이미 유럽 중시 정책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트루먼은 한국에서의 전쟁을 속히 끝내려 하였고, 유럽에서의 미군 증강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만주 폭격과 원자탄 사용을 건의하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를 1951년 4월 해입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

  - 미국과 중국은 휴전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정전협상을 시작했다. 정전협상의 주요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포로 문제, 감독기구 구성 등이었다.

  · 군사분계선 설정: 유엔 측(현 교전선) vs 공산 측(38도선)

  · 포로 문제: 유엔 측(일대일 교환) vs 공산 측(무조건 석방, 일괄 교환)

   * 당시 공산 측이 제시한 유엔군 포로는 1만 1천여 명. 유엔 측은 13만이 넘는 공산군 포로를 수용

 2) 포로 교환 문제에 따른 북한, 중국, 소련의 동상이몽

 김일성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여 유엔군이 주장하는 포로 송환 방법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중국과 소련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국군의 현대화를 계획했다. 한국전쟁이 계속돼 소련으로부터 장비 지원을 받는다면 중국 군대 발전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최종적으로 타이완과 관련된 상황에서도 유용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탈린도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면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포로 문제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6.25 전쟁에 이은 베트남 전쟁까지.. 몇몇 지도자의 오산과 오판이 빚어진 비극은 현대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오판과 충돌, 그리고 70년의 대치와 갈등. 전쟁을 다시 말하는 것은 그 반대편 언덕, 평화로 가기 위해서다.

 

전쟁의 유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평화다.

 

확장하기(feat. 한국사 세특)

1. 국제적인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찾아보기

- 임진왜란도 임진전쟁, 조일전쟁, 도자기 전쟁, 7년전쟁, 항왜원조, 만력 조선전쟁 등 다양한 명칭이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찾아보고, 나름의 역사적 해석을 해보면 어떨까요?

2. 지금의 미·중관계..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적 방향은?

- 70여년 전의 역사적 교훈을 비롯해 미·중 관계의 역사를 심도있게 추적해보고,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외교적 방향을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 설명해 보면 어떨까요?

 

*포스팅에 역사적인 오류나 문제가 있을 시 댓글로 알려주세요.

*개인적인 의견이 담겨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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